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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검증된 길
200년간 ‘미국의 정신’을 완벽히 대변해온 인생의 지혜를 읽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미국에서도 ‘미국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로 존경받고 있으며, 무에서 시작해 맨손으로 여러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2년이 전부였으나, 21세에 인쇄 일을 배우면서 성실과 근면함을 기반으로, 순전히 독학으로 짧고 명료한 글쓰기 능력을 연마했고, 글에 대한 안목 덕분에 인쇄업자로 성공했다.
그는 부유하지 않았고 대단한 권력도 없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학습 능력을 발휘하며 근면과 절약과 인내로 홀로 일어섰다. 작가, 우체국장, 발명가, 시민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고, 정치와 과학 등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상의 불편함을 적극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기 지식을 최대한 선용한, 실용적 지혜자였다.
지난 200년 동안 막스 베버나 데이비드 흄, 카를 마르크스 등 위대한 사상가와 실천가들도 이 자서전의 탁월함을 인정했다. 실제로 프랭클린이 자서전에서 밝힌 절제와 근면 등 13가지 덕목은 발간 후 200년이 넘는 동안 자기계발의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많은 미국인은 이 덕목을 따라 실제로 성공했고, 그가 제시한 성공의 길은 인생 공식이 되었다. 이러한 상징성으로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화 100달러 지폐의 모델로 앞면에 등장한다. 그의 인생이 ‘미국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다.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 관리, 자기 관리, 인간관계 관리, 습관의 힘, 인격 성장, 공공의식, 실용정신, 개척정신, 신뢰라는 자산, 지식 축적 등에 관한 중요한 원리와 실천 사례를 우리는 프랭클린의 삶을 통해 발견하고 체득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밝힌 몇 가지 삶의 원리 중 하나라도 받아들여 적용해본다면 누구라도 자기 분야에서 큰 진전을 경험하고, 일가를 이루게 될 것이다.
1부 윌리엄 프랭클린에게
_1771년 트와이퍼드, 세인트애서프 감독관에서
1장 보스턴의 조상과 청소년기
2장 인쇄소 도제 시절
3장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다
4장 첫 보스턴 방문
5장 필라델피아의 친구들
6장 첫 번째 영국 여행
7장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8장 성공적인 사업을 위한 공공 서비스
2부 내 삶에 관한 이야기
_1784년 파시에서 다시 시작하다
9장 완벽한 도덕적 삶을 위한 계획
3부 집에서 계속 쓰다
_1788년 8월
10장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및 기타 활동
11장 공적인 일에 관심이 생기다
12장 주 방위군을 조직하다
13장 필라델피아 대학교를 설립하다
14장 필라델피아에서의 정치 이야기
15장 올버니 연합 계획
16장 독점 경영자들과의 분쟁
17장 브래독 탐험대
18장 프랭클린의 국경 방어
19장 과학 실험
20장 펜실베이니아주를 위해 일하다
해제 | 강주헌
벤저민 프랭클린 연보
지은이 ∥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1706년 미국 보스턴에서 청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정규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2년이 전부였으나, 10세부터 아버지의 양초 제조업을 돕기 시작하여, 12세부터는 형 제임스의 도제로 인쇄업에 입문한 뒤, 17세인 1723년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21세에 본격적으로 인쇄업을 시작하고, 23세부터 신문사 발행인으로 성공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인쇄업자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독학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을 익혀 스스로 지성을 넓혀나갔다.
그 후로는 개인적인 행복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 발전에 눈을 돌려 43세에는 훗날 필라델피아 대학교가 되는 교육 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교장까지 지냈다. 또 회원제 도서관(25세), 필라델피아 최초의 소방서 설립(30세) 등에 관여하며 시민운동가로도 맹활약했다. 과학자로서는 프랭클린 난로를 발명했고(36세), 번개와 전기가 같은 성질을 띤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함으로써 피뢰침을 발명하기도 했다(46세).
1748년 필라델피아 시의회 의원을 시작으로(42세), 정치에 뛰어든 그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준비를 위한 기초 위원으로서 활동하고(70세), 주프랑스 대사로서 미국과 영국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내는 데 크게 공헌했다(70~79세). 나아가 말년에는 미국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제헌회의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활동했다(81세). 런던에서 미국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식민지 연방을 위해 일한 공로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최초의 미국인”이란 별칭을 얻었다.
이처럼 프랭클린은 인쇄업자, 작가, 우체국장, 발명가, 시민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등으로 활동한 만능인이었고, 정치와 과학 등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절약과 근면, 교육의 힘과 공동체 정신 및 자치를 중시하고, 정치와 종교의 독선을 경계하며, 계몽주의와 관용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미국적인 정신을 정립하는 데 디딤돌을 놓았다.
옮긴이 ∥ 강주헌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했다. 번역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영어와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습관의 힘』, 『문명의 붕괴』, 『12가지 인생의 법칙』, 『슬럼독 밀리어네어』,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 산책』,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등 100여 권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강주헌의 영어번역 테크닉』 등이 있다.
내가 그랬듯, 너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으리라 생각한다. 너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거의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마침 시골에서 일주일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자리에 앉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제는 상당히 풍족하고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후손들은 내가 성공하는 데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손들이 내 이야기를 읽고 각자 처지에 맞추어 적합한 방법을 찾아 따르면 되지 않을까 싶다. …
나는 문법 학교를 채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해 입학한 학급의 중간쯤이었지만 점차 일등으로 올라섰고, 게다가 위 학년으로 월반까지 했다. 또 그해 말에는 학습 수준을 맞추기 위해 3학년으로 월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아버지는 생각이 바뀌었던지 나를 문법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냈다.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까닭에 학비를 부담할 만한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넉넉하게 사는 건 아니라는 이유였다.
-1장. 보스턴의 조상과 청소년기, p.13, 14, 21
나는 소크라테스식 논쟁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방법을 내 것으로 만들려 애썼다. 상대 의견에 반박하지만 내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상대에게 겸손하게 묻고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나는 앤서니 섀프츠베리와 앤서니 콜린스를 읽고 우리 종교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된 터라, 이 방법이 나에게는 안전하지만 상대방을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 방법을 즐겨 꾸준히 연습한 끝에 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사람도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방법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따라서 나는 내 지적 수준이나 명분을 넘어서는 승리까지 쟁취할 수 있었다.
-2장. 인쇄소 도제 시절, p.35-36
우리 인쇄소는 종종 활자가 부족했다. 당시 미국에는 활자를 주조하는 데가 없었다. 런던에 있을 때 제임스 인쇄소에서 활자 주조하는 걸 본 적이 있었지만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기억을 더듬어 주형(鑄型)을 만들었고, 우리가 갖고 있던 활자를 각인기 삼아 납 주형에 찍어 눌러 그럭저럭 활자를 채울 수 있었다. 때로는 필요한 모형을 조각하고 잉크도 만들어 사용했다. 심지어 창고를 지키는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잡역부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팔방미인 격으로 일해야 했지만, 직공들의 능력이 향상되면서 내 일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급기야 카이머는 나에게 두 번째 분기 임금을 지급하면서 내 임금이 그에게는 무척 부담스럽다며 임금을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무례해졌고, 주인 노릇을 하려 들며 흠을 잡고 까탈스럽게 구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마디로 언제라도 크게 폭발할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참고 또 참으며 계속 버텼고 그의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하찮은 일로 우리 관계는 마침내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
나는 인간 사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진실함’과 ‘성실함’, ‘청렴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신조와 도덕관에 대해 글로 써두었고 평생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관련된 글은 지금도 내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시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이 어떤 행동을 금지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니고, 어떤 행동을 권장한 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에는 크게 공감했다. 요컨대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나쁜 것이기 때문이고, 어떤 행동을 권장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7장.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p.100-101, 106-107
토론 후에도 나는 그 문제에 깊이 몰두한 끝에 「지폐의 성격과 필요성」이란 제목의 소논문을 써서 익명으로 신문에 게재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그 논문의 논조를 환영했지만 부자들은 싫어했다. 내 논문이 더 많은 통화량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부자들 중에 내 논문을 반박할 만한 글을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반대는 점차 힘을 잃었고, 결국 의회에서 지폐 추가 발행 안건이 과반수로 통과되었다. 그 안건 통과에서 내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의회 친구들이 지폐 인쇄 일을 나에게 맡겨 보상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지폐 인쇄 일은 상당한 이익을 보장했기 때문에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것 역시 내가 그런대로 글을 쓰는 능력을 지닌 덕분에 얻은 이익이었다.
-8장. 성공적인 사업을 위한 공공 서비스, p.120
나는 한 주에 하나의 덕목을 엄격히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첫 주에는 ‘절제’를 방해하는 요인을 멀리하려 애썼고 다른 덕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날의 잘못을 잊지 않고 표시했다. 그리하여 첫 주에 내가 ‘절제’에 해당하는 첫 줄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는다면 절제라는 덕목과 관련된 습관은 강화된 반면, 그렇지 않은 다른 습관은 약화된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 주에는 관심의 폭을 확대해 ‘침묵’이란 덕목에 신경 쓰며 두 줄 모두에 검은 점이 표시되지 않도록 애썼다. 이런 식으로 마지막 덕목까지 진행하면 한 과정을 끝내는 데 13주가 걸리고, 1년에 그 과정을 네 번 반복할 수 있다. …
저명한 작가의 글을 모방하며 완벽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 작가만큼 탁월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통해 글이 나아지며, 명쾌하고 읽기 쉬운 글을 써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일흔아홉에 이르기까지 항상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이유가 이 작은 습관 덕분이었다는 것을(물론 하나님의 축복 덕분이지만) 내 후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반전이 있을지는 하나님 손에 달렸지만, 설령 역경이 닥치더라도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돌아보면 그 역경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절제’한 덕분에 나는 오래전부터 건강하게 살았지만 지금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또 ‘근면’과 ‘절약’이란 덕목을 습관화한 덕분에 젊었을 때부터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상대적으로 쉽게 이겨내고 재산도 모았다. 지식을 쌓아 쓸모있는 시민이 되었고, 지식인들에게 높은 평가도 받았다. ‘성실’하고 ‘정의’롭게 행동함으로써 국가의 신뢰를 얻었고, 명예로운 직책도 부여받았다. 그 덕목들을 완전한 수준까지는 습득하지 못했지만, 불완전 상태에서도 그 덕목들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덕분에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능력을 갖추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나와 어울리고 싶어 하고 젊은이들 또한 내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 따라서 내 후손 중에서도 몇몇은 이를 본받아 보람찬 결실을 거둘 수 있으면 좋겠다.
-9장. 완벽한 도덕적 삶을 위한 계획, p.157, 163-164
1739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조지 휫필드 목사가 우리 도시로 왔다. 휫필드는 아일랜드에서도 순회 설교자로 명성을 떨치던 목사였다. 그는 처음에 몇몇 교회의 허락을 얻어 설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성직자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교회 설교단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야외에서 설교해야 했다. 종파와 교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신자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신기해 그의 웅변적인 설교가 신자들에게 미치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그는 신자들을 향해 “반은 짐승이고 반은 악마”라며 독설을 퍼부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무척 칭송하고 존경했다. 게다가 곧이어 주민들의 행동거지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에 시내를 걷다 보면 어디에서나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종교에 무심하고 무관심하던 세상이 온통 종교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11장. 공적인 일에 관심이 생기다, p.190
미국 건국의 아버지 프랭클린이 직접 밝히는,
확실한 성공과 지혜의 원형
프랭클린은 자수성가한 사람의 표본이기도 하지만, 초기 미국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미국적인 남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부유하지 않았고 대단한 권력을 쥐지도 않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면서 근면과 절약과 인내라는 덕목을 제대로 실천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몸소 증명했다. 이런 점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면 기회의 땅에서 어떤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프랭클린이 자서전 쓰기를 중단하고 10년쯤 지났을 때, 필라델피아의 상인 에이블 제임스가 프랭클린에게 자서전을 계속 쓰라고 재촉하는 편지에서도 그의 자서전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아직 뒤를 이어 쓰지 않았다면 더는 늦추지 말길 바랍니다. 삶은 불확실하지요. 설교자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친절하고 인간적이며 자애로운 벤저민 프랭클린이 친구들과 세상에 재미와 교훈을 주는 작업, 즉 소수에게만 아니라 수백만에게 유익한 즐거움을 주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존경받는 자수성가형 인물의 본이 되다
1부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아들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당시 65세이던 프랭클린은 할아버지, 삼촌들, 아버지와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를 전해주는 것으로 자서전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독단적인 판단에 따라 열 살 때 정규 교육을 끝내고 제임스 형의 도제로 들어가 인쇄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형제간에는 다툼이 잦아졌고 벤저민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형의 입김 때문에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로 이주한다.
2부는 프랭클린이 1780년대 초 파리에서 지낼 때 받은 두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둘 다 그에게 자서전 집필을 계속하라고 독려하는 편지다. 그래서 파리 외곽에 있는 파시에서 프랭클린은 1784년 자서전 2부를 쓰기 시작하며 공립 도서관 설립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고는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겠다는, 대담하면서도 몹시 어려운 계획”에 관해 언급하며 13가지 미덕을 나열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대부분 진실한 성품을 훈련하여 체득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늘나라에서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고 싶다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게 더 낫다. … 이런 이유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청렴과 진실성이야말로 성공을 보장해주는 수단이라는 걸 젊은이들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해왔다.”
3부는 1788년 8월 프랭클린이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자서전을 다시 시작하려 하지만 독립전쟁 중에 많은 자료가 사라졌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1부가 끝난 시점으로 돌아가 1732년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처음 발행해 성공을 거둔 과정을 회상한다.
이즈음 프랭클린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를 공부하고 제임스 형과도 화해한다. 1736년에는 의회 서기직을 받아들이며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다. 이듬해에는 우체국 관리자가 되어 신문을 위한 기사를 얻고 구독자 확보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한편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여러 식민지를 대신해 인디언들과의 협상 대표로 선출된다. 이때 프랭클린은 식민지 연방을 제안하지만 그 제안은 채택되지 않는다. 두 연대를 이끌고 영국에서 들어온 브래독 장군이 군대 식량과 군사 장비를 운반할 마차와 말을 구하는 일에서도 사비를 털어 보증까지 서가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앞장선다. 특히 그는 종교가 달라도, 정치적 진영이 달라도, 불편부당한 일처리와 함께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끔 사업을 진행해 나갔기에 심지어 반대편에 선 총독까지도 사석에서는 그의 편을 들었다.
200년간 ‘미국의 정신’을 완벽히 대변해온
인생 고전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후에 이 책을 썼다(어떤 이유에선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잘못과 부족함, 실수를 소상하게 밝히고 인정함으로써,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근면하고 인내하며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개인적인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불리한 태생과 인간 조건에도 불구하고 깊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한 독학과 지적인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인생의 많은 약점을 벌충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필라델피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인쇄소 두 곳과 경쟁해야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는 매일 두세 시간씩 자신이 도입하고 만들어간 공공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며 아버지가 허락해주지 않았던 교육의 기회를 조금씩 만회해나갔다고 고백한다.
요즘 말로 하면, ‘흙수저’ 물고 태어나 평생 가난과 씨름하며 형제들(17명의 형제자매 중에 15번째였다!)에 치여 형들 눈치나 보며 주눅 든 채 살 수밖에 없었던 그였지만, 균형 잡힌 지성과 치우침 없는 인간관계, 내면의 미덕 훈련 등을 통해 날마다 1%씩 성장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미국 건국 초기에 독립선언문 초안에 참여하고,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는 등 외교적인 성과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난 200년간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삶에 자기계발의 공식처럼 인정받아 온 그가 직접 밝힌 인생의 지혜에 귀 기울여보자.